비현실로의 여행(BMW M5)

“현실적인 드림카“처럼 바보 같은 말이 또 있을까. 어려서부터 변신로봇이나 광선총 같은 이차원적인 장난감에 익숙한 남자의 로망은 어디까지나 비현실적인 것에 대한 동경, 과격하다 못해 폭력적이기까지 한 500마력의 동력성능으로 시종 운전자를 농락하는 M5는 전혀 현실적인 탈것이 아니다. 원심력과 관성 따위의 자연법칙에 콧방귀를 끼는 이 괴물의 세계는 문 네 개에 널찍한 트렁크가 달렸다고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Scene #1>

남자는 재생 타이어가 아스팔트 노면을 후벼파는 소리에 눈을 떴다. 엊그제 면허를 딴 아주머니부터 앞도 잘 안 보이는 할아버지까지, 지구상의 모든 차들이 다 모인 것 같은 서울 강남대로에 후미등의 흐름이 뜸해질 시간 어딘가에서 덤프트럭들이 몰려온다.
내일쯤 근처에 또 새로운 빌딩이 들어설 모양이다.
여느 깨 같으면 트럭 운전수들에게 저주를 퍼부었겠지만 언제부턴가 이 소음은 남자에게 자명종 역할을 했다. 시침이 아래로 향해 있는 것 보면 잠자리에 든 지 두 시간 남짓. 그러나 거짓말처럼 머리가 맑다.


<아내가 잠든 새벽에 즐기는 애인과의 데이트>

남자는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왔다. 최근 들어 새벽녘이면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을 와이프가 눈치채고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버릇처럼 아이들 방문을 열어 본다. 다정한 대화를 나눠 본 지 꽤 됐지만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의심해 본 적은 없다. 인기척에 큰녀석이 깬 듯 싶더니 이내 고른 숨을 내쉬며 입맛을 다신다. 침대맡에는 휴일 날 같이 타자면 사준 롤러 블레이드가 놓여 있다. 밖에서 타던 것 왜 방에 들여 놓냐고 잔소리를 했는데, 벌써 시위를 할 줄 아는 나이다. 세월은 참으로 빠르다. 가벼운 옷을 걸쳐입고 남자는 지하 주차장을 향했다. 얌전을 떠는 흰색 세단과 지루한 검은색 리무진 사이로 그의 애마가 은근한 조명을 받아 검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묵직한 문을 열고 시트에 걸터앉자 은은한 가죽냄새가 피어 오른다. 여자들이 새 가죽소파에 열광하는 것은 이 냄새와 감촉 때문일까. 몇 년 전에 새 소파를 사던 날 앉지도 못하게 하던 와이프의 얼굴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난다.
지금이라도 다시 침대로 돌아가 잠을 청할까 하다가 키를 꽂아 넣었다. 내일은 골프 약속이 없는 토요일이라는 것을 생각해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학원에 갈 테고 와이프도 주말약속이 있을 터.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짧은 여행을 떠나는데 아무런 제약도 없었다.

“진짜 사나이의 차는 열쇠가 왼쪽에 꽃혀야 돼.”
악취가 진동하는 남의 입속을 들여다보는 직업을 가진 주제에 검은색 독일제 스포츠카를 한 대 사더니 거들먹거리는 버릇이 생긴 친구녀석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남자는 익숙한 인터페이스를 바꾸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동차 키는 오른쪽에 꽂는 거라구.”듣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중얼거려 본다. 처음에는 장난감 스위치처럼 느껴지던 시동 버튼이 지금은 애인집 초인종을 노르는 것마냥 가슴 뛰는 작업이다.
버튼을 누르자 배기음이 주차장 벽면에 반사돼 우렁차게 퍼진다. ‘전면주차’푯말을 무시하고 꽁무니로 주차하게 된 것도 이 차를 구입한 이후 생긴 버릇이다. 수위 아저씨에게 걸리면 골치 아파지기 때문에 서둘러 주차장을 나섰다.


<Scene #2>

말이 오백마리나 들어 있다니까요…영업사원은 침을 튀며 이차의 성능에 대해 애기했었다. 어떤 느낌일지 가슴이 두근두근했지만 ‘그래봐야 오토면허로도 몰 수 있는 차 아니냐’며 호기를 부렸다. 남자가 나이를 먹으면 속마음을 숨기게 되기 마련이다. 약삭 빠른 영업사원은 ‘사장님 같은 특별한 분을 위한 차’로 작전을 바꿨다.
첫 데이트의 신경전처럼 의미없는 선문답을 벌이긴 했어도 500마력에 끌린 것이 사실이다. 영업사원에게는 비밀이지만 이 차는 오래 전부터 남자의 드림카였다. 내 차로 만들 수 있는 만큼의 능력을 비웠을 때 때맞춰 모델 체인지가 된 것이 숙명으로까지 느껴졌을 정도다.
그러나 첫인상은 생각보다 얌전했다. 올라타자마자 뭔가 모여줄 줄 알았건만, 시동을 걸고 매장을 나설 때는 문이 네 개 달린 차중 가장 강력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었다. 국산차만큼 흔해진 5시리즈 보디에 시선을 주는 사람도 없고, 회전수를 올리며 시비를 걸어 오는 스포츠카도 없었다. 그저 평범한 세단일 뿐이었다.


<Scene #3>

사건은 주행거리 5천 km를 넘기던 날 일어났다. 막히는 퇴근길에서 주행거리계의 숫자가 5천 km를 살짝 넘은 것을 발견했다. 영업사원이 신신당부하던 길들이기 기간이 끝난 것이다. 질 좋은 알루미늄을 깎아 만든 I-드라이브 버튼을 돌려 엔진오일의 양을 체크했다. 엔진은 이미 따끈하게 달아올랐고 미션의 움직임도 매끄럽다. 마른침이 꿀꺽 넘어간다. 스티어링 휠에 박힌 ‘M’버튼을 누르면, 서스펜션은 고속주행을 위해 딱딱해질 것이고 400마력으로 봉인되어 있던 엔진은 500마력의 힘을 모두 쏟아낼 터였다. 그러나 지금 상태로도 시내에서는 엑셀러레이터를 2초 이상 끝까지 밟을 수가 없다. 시내에서는 도저히 감당해낼 자신이 없다.
차를 돌려 뻥 뚫린 유료도로 위에 오른 남자는 주변에 차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M버튼을 눌렀다. 차가 울컥 하는가 싶더니 도로주변의 가로등이 익숙하지 않은 속도로 동공 속에 파고든다. 머리는 헤드레스트에 쳐박히고, 저 앞에 가던 고속버스가 마치 최고속으로 후진하는 것으럼 가까워진다. 피가 머리 뒤쪽으로 쏠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엔진 회전음은 로버트 플랜트의 히스테리컬한 목소리처럼 울려 퍼지고, 바깥 풍경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떨리기 시작한다. 겁을 먹고 만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과속단속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진 후였지만 평소보다 한 박자가 느렸다. 필름에는 빈 공간만 찍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법정속도를 아주 약간만 넘길 정도로 속도를 낮춘 남자는 그만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폭력 앞에서 당황한 것은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Scene #4>

집을 나선 남자는 어느새 동해안으로 목적지를 잡고 한적한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이 시간의 고속도로는 화물차의 세상이다. 이들의 느릿느릿한 속도는 용서할 수 있지만 사이드미러 속의 불빛이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도 뒤차의 속도를 계산하지 못한 채 차선을 바꿔 앞을 가로막는 만행(?)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가끔씩은 속도를 높이는 차들도 있지만 이들과 쓸모없는 매틀을 벌일 이유는 없다.
그런 점에서 새벽녘의 국도는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잘 포장된데다 차로가 넓고 차도 거의 없었다. 시속 200km로 크루징이 가능한 국도는 아마 아시아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할 것이다. 이 정도면 스페인이 부럽지 않다.
서울을 벗어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 M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이 차는 여전히 현실세계에 머무를 것이다. 저쪽 세계로 가느냐 마느냐는 어디까지나 그의 선택이다. 결과는 언제나 같았지만 잠깐 고민하는 척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좋지만 먼저 옷을 벗지는 않을께요’라고 말하는 여자를 눈앞에 둔 것처럼.


<그 남자, M버튼을 드디어 누르다.>

때가 왔다. 스티어링 휠의 M버튼을 누르자 굉음과 함께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한다.
폭력적인 가속에는 익숙해졌지만 남자는 아직 이 차를 ‘애마’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 비현실적인 가속력을 코너에서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부르지 않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코너와 코너 사이의 짧은 직선을 거의 생략해 버리는 이차의 막강한 가속력에 남자는 그만 겁에 질리고 말았다. 그동안 M5를 타면서 적당한 속도에서는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코너를 베어내는 실력이 생겼지만 500마리의 말이 제 힘을 내자 꽁무니가 바깥으로 밀려나가려고 하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만약 전자장치가 차체를 제어해 주지 않았다면 몇 번이나 사고를 당했을지 모를 일이다. 제 파워를 내게 된 후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앞 타이어의 숄더가 다 닳아 버렸다. 운전실력이 들통난 것 같아 창피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한계령에 접어들기 직전 흰색 메르세데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색깔을 보면 곱게 늙어 가는 아줌마가 타고 있을 것 같지만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헤드라이트 불빛을 봤는지 메르세데스의 속도가 올라단다. 호전적인 운전자가 탄 메르세데스는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다른 차를 탈 때 큰 코 다친 적이 몇 번 있다. 저 충실한 자동차는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 닥쳐도 주인에게는 비밀로 하고 자신이 알아서 수습한다. 덕분에 메르세데스의 운전자는 전투용 알약을 먹은 군인처럼 어무런 불안감도, 위기감도 느끼지 않고 상대를 누를 수 있다. 남자는 아직 자신의 차를 완벽히 다룰 수 없는 상태고, 무대는 헤이핀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한계령이다. 잘못하다가는 기분을 상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코너에 들어설 때쯤 메르세데스의 바로 뒤에 붙을 수 있었다. “가속력은 역시 끝내준다니까”초조함을 줄이기 위해 혼잣말을 해본다. 브레이크에도 한참 여유가 있다. 흰색 트렁크에 AMG마크가 보인다, 흰색 AMG도 빠르게 따라붙는 M5를 의식했는지 속도를 더 높인다. 심술맞아 보이는 앤젤아이와 뻥 뚫린 에어댐의 차이까지 알아차리기는 힘들 것이다. AMG의 운전자는 이차의 보닛 아래에 말 500마리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7단으로 달리던 차는 브레이킹과 동시에 자동으로 스내칭을 하며 5단으로 바뀐다. 붕붕 소리를 내며 SMG가 자동으로 회전수를 맞추는 소리를 들으니 마치 F1 중계를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남자는 변속기를 앞으로 두 번 더 밀어 3단에 집어넣고 코너출구가 보임과 동시에 액셀에 힘을 넣었다. 압도적인 횡G가 옆구리를 눌러대는 것을 느끼며 중앙선을 넘어 흰색 메르세데스를 앞질렀다. 스티어링 휠을 살짝 꺾어 다시 중앙선을 넘어 제자리로 돌아왔다.


<새벽녘 국도에서 AMG를 누르다>

메르세데스 운전자의 화난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담배 연기를 빼내기 위해 살짝 열어 두었던 유리창 사이로 메르세데스와 M5의 보닛 안에서 18개의 실린더가 터질 듯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B급 공포여와 여주인공의 비명처럼 들려오는 타이어 스키드음이 머리털을 세운다.
남자는 창문을 닫고 오리오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에서 알 디 메올라의 기타 연주가 흘러나온다. 도대체 유리에 어떤 짓을 했길래 저 끔찍한 소리들을 지울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따라오는 메르세데스를 생각하면 호기를 부릴 때는 아니었다. 룸미러를 슬쩍 들여다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AMG 오너는 약이 바짝 오른 모양이다. 들이받을 것처럼 차간거리를 바짝 좁히지만 상향등을 켜거나 경적을 울리지는 않는다. 역시 비슷한 시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상대가 맞장구를 쳐오자 남자는 한결 흥분되었다. 이제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아 봐야지.
본격적인 도약 전 남자는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뗐다. 엔진 브레이크가 걸리며 기분 좋은 감속G가 몸을 떠민다. 오랜만에 수동차의 감각이 느껴진다. 방향을 바꾸고 다시 액셀에 발을 올리려고 하면 순식간에, 그야말로 순식간에 비정상적인 정도로 속도가 붙는다. 마치 운전자의 머릿속을 스캔하는 장치라도 달려 있어서 액셀을 밟아야겠다는 생각만 하면 알아서 가속하는 느낌. 엔진과 페달, 그리도 남자의 대뇌 사이에 신격이라도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응답성이다. 불빛 없는 산길, 어둠만이 일그러지면서 속도감을 알려준다. 페달을 끝까지 밟고 몇 초 이상을 달릴 수 있는 긴 직선이 나오자 안구가 나꾸만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아 눈을 비벼 본다. AMG는 수십미터나 떨어져 있다.
코너에 들어서자 새로 갈아 끼운 타이어가 제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녀석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진 탓인지 차의 하중과 횡G를 타이어에 전달해 노면을 꾹꾹 누를 수 있게 됐다. 휘청거리며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서스펜션을 통해 전해져 오는 느낌을 통해 앞뒤 타이어가 전체적으로 골고루 땅에 닿아 닳는 것을 운전석에서도 느낄 수 있다. 얼만 전 낮게 가라앉은 채로 코너 출구에서 땅에 스키드 마크를 남기며 가속하던 바이크의 뒷모습을 본 후부터 이미지트레이닝을 한 덕분이다. 그 거대한 바이크는 정말 멋지고 빨랐다. 뒷모습만으로도 한 수 배웠기 때문에 추월당했는데도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처럼 달리면 왠지 그 f이더와 만나더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차의 무게도, 중력도, 파워에 대한 부담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믿음직하고 빠른 차와 굽이진 길, 그리고 그 자신이 있을 뿐이었다.


<가족을 태울 수 있는 수퍼카>

아차, 너무 몰두한 탓인지 AMG를 잊고 있었다. 룸미러를 슬쩍 들여다봤지만 헤드라이트는 보이지 않는다. 수십 개의 헤어핀이 이어지는 내리막은 아무래도 무겁고 커다란 메르세데스에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도전심을 잊고 페이스를 늦췄는지 한참을 서행해도 보이지 않는다.
연속되는 헤어핀에 때맞춰 클라이막스에 올랐던 알 디 메올라의 기타 연주가 느려지며 여운을 남긴다. “Race wit Devil on the Spanish highway” 일부러 고른 것처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백그라운드 음악속에서 생각을 해본다.
“메올라, 자네의 손가락도 이 차의 피스톤보다는 느릴 거라구.”
남자는 건방진 멘트를 날리고는 보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수줍어 웃었다.
동해 바다 위로 어슴푸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지난주에 찾아낸 별미식당에서 이른 아침을 먹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 와이프와 아이들에게 주말 약속을 취소하라고 말해야지. 가장답게. 그리고는 오랜만에 이 귀여운 애마에 와이프와 아이들을 태우고 다시 동해바다에 오기로 마음먹었다. 일요일 아침에는 저 눈부신 일출을 가족과 함께 볼 수 있을 것이다.
“잘 부탁한다. 친구. 좀 무겁겠지만…..”
남자는 햇살 때문에 눈을 찌푸리면서 애마의 대시보드를 두들기며 속삭였다.


-카비젼에서 나온  시승기에서 펌.

Dr.kchris

Hello, I'm Dr.kchris, a neuroscience researcher. I love studying and trying new things and also love challenging myself. Have a great d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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