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투항후 강유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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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 6년(243)에 진서대장군으로 승진했고, 양주자사를 겸임했다.10년(247)에 위장군으로 승진하고, 대장군 비의와 함께 녹상서사가 되었다.

이 해, 문산군 평강현(平康縣)의 이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강유는 병력을이끌고 토벌하여 평정시켰다. 또 농서 및 남안(南安) 및 금성(金城)의 경계로 나가 위나라 대장군 곽회 및 하후패 등과 조수에서 싸웠다.

호왕(胡王) 치무대(治無戴) 등이 부락을 바치고 투항했으므로, 강유는 그들을 데리고 돌아와 안주시켰다.



연희 12년(249)에 강유에게 부절을 주어 또 서평(西平)으로 출정하도록 했는데,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강유는 스스로 서쪽 지역의 풍속에 익숙하며, 겸하여 자기의 재능과 무력에 자부심을 가졌으므로 강족과 호족을 유인하여 자신의 오른쪽 날개로 삼으려고 하며, 농산 서쪽을 위나라에서 끊어 지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항상 대규모로 출병하려고 하여 비의는 늘 그것을 제지하며, 그에게 준 병력은 만 명에 불과했다.



연희 16년(253) 봄에 비위가 세상을 떠났다. 여름, 강유는 수만 명을 이끌고 석영(石營)을 나와 동정(董亭)을 지나 남안(南安)을 포위했지만, 위의 옹주자사 진대가 포위를 풀고 낙문(落門)까지 이르렀고 강유는 식량을 다 소비하였으므로 물러나 돌아왔다.



다음해, 독중외군사의 직위를 더했다. 다시 농서로 출병하였는데, 적도현을 지키고 있던 장 이간(李簡)이 성을 들어 투항했다. 강유는 나아가 양무(襄武)를 포위하고, 위나라 장수 서질(徐質)과 교전하여 머리를 베어 적을 격파시켰으므로 위나라 군대는 패하여 물러났다.

강유는 승리의 여세를 타고 진격하여 매우 많은 성들을 항복시켰으며, 하관(河關) 및 적도 및 임조 세 현의 백성들을 빼앗아 돌아왔다.



연희 18년(255)에 또 거기장군 하후패 등과 함께 적도에서 나와 조서에서 위의 옹주자사 왕경(王經)을 크게 격파시쳤다. 왕경의 병사들가운데 죽은 자는 수만 명이나 되었다. 왕경이 퇴각하여 적도성을 지키자, 강유는 그곳을 포위했다. 위의 정서장군 진태가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포위망을 풀었고, 강유는 퇴각하여 종제(鍾題)에 주둔했다.



연희 19년(256) 봄에 강유는 원정에 앞서 대장군으로 승진했다. 다시 병사와 말을 정돈하고, 진서대장군 호제(湖濟)와 상봉에서 만날 날을 약속하였는데, 호제가 약속을 깨고 도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강유는 단곡(段谷)에서 위나라 대장군 등애에게 격파되어 병사들을 뿔뿔이 흩어졌으며, 매우 많은 수가 사망했다. 병사들은 이로 인해 모두 강유를 원망했고, 농서 서쪽 지역에서도 소동이 일어나 안정되지 못했다. 강유는 잘못을 사과하고 책임을 지기위해 자신의 관직을 삭탈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후장군 및 행대장군사로 강등되었다.



연희 20년(257)에 위나라 정동대장군 제갈탄이 회남에서 모반하여 관중의 병사를 나누어 동쪽으로 내려갔다. 강유는 그 틈을 타서 진천으로향하려고 또 수만 명을 이끌고 낙곡(駱谷)을 나와 곧장 침령(沈嶺)에 도착했다. 당시 장성(長城)을 점령하고 산에 의지하여 진영을 만들

었다. 사마망과 등애는 위수에 기대 영채를 공고히 하였다. 강유가 몇차례 도전하였지만, 사마망과 등애는 응하지 않았다.



연희 20년(258)에 강유는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여러 진영을 교차시켜 수비하는 것은 비록 《주역》에서 말하는 ‘중문(重門;문을 몇 겹으로 쌓는다)’의 의미로 적의 습격을 방어할 수는 있지만 큰 이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적이 도착할때를 알도록 하여 각각, 곡식을 모아 한중과 악성의 두 성까지 물러나 적이 평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중요한 곳에 병사를 주둔시켜 수비하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유사시에는 유격대를 동시에 나아가게 하여 그들의 허점을 살피도록 하십시오. 적

군은 관소를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고 들에 흩어져 있는 식량이 없어 천 리 떨어진 곳까지 식량을 운반해 와야 되므로 자연스레 피폐해질 것입니다. 적군이 퇴각하는 날, 여러 성에서 일제히 나와 유격대와 함께 힘을 합쳐 치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적군을 전멸시키는 방법입니다.」



그 결과 독한중 호제를 한수까지 물러나게 했으며, 감군 왕함(王含)에게 악성을 지키도록 하고, 호군 장무에게 한성을 지키도록 했으며, 또 서안,건위,무위,석문(石門),무성(武城),건창,임원(臨遠)에 모두 수비진을 주둔시켰다.



경요 5년(262), 강유는 병사를 인솔하여 한(漢),후화(侯和)로 출병하였다가 등애에게 격파되어 답중으로 돌아와 주둔했다.



강유는 본래 고향을 떠나 타향(촉)에 목을 기탁하고 해를 연이어 전쟁을 하면서도 공적을 세우지 못했다. 이때 환관 황호 등이 조정에서 권력을 잡고, 우대장군 염우(閻宇)가 황호와 결탁하였다. 따라서 황호는 은밀히 강유를 폐하고 염우를 세우고자 했다. 강유 또한 그들을 의심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위험을 느끼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성도로 돌아가지 못했다.



경요 6년(263)에 강유가 유선에게 표를 올렸다.

「듣건대, 종회는 관중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켜 우리를 공격하여 취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응당 장익과 요화를 보내 각 군대를 지휘하여 양안관구(陽安關口)와 음평교두(陰平橋頭)로 나누어 지키도록 하여 미연에 방지해야만 합니다.」



황호는 귀신이나 미신의 말을 신용하고, 적군은 끝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우선에게 이 일을 진행시키지 말라고 했다. 신하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종회가 낙곡으로 향하고, 등애가 답중으로 진입한 연후에 비로소 우거기(右車騎) 요화를 답중으로 보내 강유의 원군이 되도록 했으며, 좌거기 장익과 보국대장군 동궐(童厥) 등은 양안관구로 가서 여러 진영의 밖에서 지원부대가 되도록 했다. 음평까지 왔을 때, 위나라 대장 제갈서가 건위(建威)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므로 정지하고 그들을 기다렸다. 한 달 남짓 후, 강유는 등애에게 격파되어 음평으로 돌아와 주둔했다.



종회가 한,악 두 성을 공격하며 포위하고, 따로 장수를 보내 관구(關口;안양관구)로 진격하도록 하였으므로, 장서(蔣舒)는 성을 열고 나와 항복했고, 부첨(傅僉)은 저항하다 전사했다. 종회는 낙성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는데, 관구가 이미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자 계속 달려 진격했다. 장익과 동궐이 한수에 도착하자, 강유와 요화 또한 음평을 버리고 후퇴했고, 마침 장익,동궐과 회합하여 모두 검각(劍閣)으로 물러나 지키며 종회에게 저항했다. 종회가 강유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공후(公侯)께서는 문무(文武)의 덕에 의지하고, 가슴속에는 세상을 덮을 지략이 있어 파촉,한중에서 공을 세워 명성이 전국에 퍼져, 먼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간에 당신에게 돌아가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항상 과거로 생각을 달려 일찍이 커다란 교화에 마음을 같이 했습니다. 오나라 계찰(季札)과 정나라의 자산(子産)은 그것으 좋은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강유는 답장을 하지 않고 진영을 배열하여 요새를 지켰다. 종회는 함락시킬 수 없었으며, 식량 운송하는 곳이 멀었으므로 장수들과 상의하여돌아갔다.



등애는 음평으로부터 경곡도(景谷道) 옆을 지나 촉 땅으로 침입하여,마침내 면죽에서 제갈첨을 격파시켰다.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을 요청하였고, 등애는 진군하여 성도를 점거했다. 강유 등이 제갈첨이 패했다는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사람은 유선이 성도를 굳게 지키려 한다고 들었고, 어떤 사람은 동쪽의 오로 들어가려 한다고 들었으며, 어떤 사람은 남쪽의 건녕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들었다.그래서 강유는 군대를 이끌고 광한,처로부터 나아가 허실을 살폈다. 오래지 않아 유선의 칙령을 받고 곧 무기를 놓고 부현의 군영 앞으로 가서 종회에게 출두 했다.

장수들은 모두 분노하며 칼을 뽑아 돌을 잘랐다.

종회는 강유 등을 후하게 대접하고, 그들의 인(印), 부절, 거개(車蓋)를 돌려주었다. 종회는 강유와 나가게 되면 같은 수레에 탔고, 앉을때도 같은 자리에 앉았다. 장수 두예에게 말했다.

“백약(百約)을 중원의 명사와 비교하면, 공휴(公休;제갈탄),태초(太初;하후현)가 이길 수 없습니다.”



종회는 등애를 죄에 빠지게 한 후, 등애가 호송 수레로 소환되자, 그대로 강유 등을 인솔하여 성도에 이르러 자칭 익주목이라 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강유에게 병사 5만 명을 주어 선봉에 서게 하려고 했는데, 위나라 장수들이 분노하여 종회와 강유를 죽이고, 강유의 처자식도 모두 주살했다. 극정은 강유를 평론하는 글을 써서 말했다.



「강백약은 상장(上將)의 중임을 맡아 신하들의 위에 있었지만, 초라한 집에 살았으며 여분의 재산이 없었고, 별당에 첩을 두어 불결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후당에는 음악을 연주하거나 노래하는 오락이 없었고, 의복은 입는 것으로 충분했으며, 수레와 말을 준비하고,음식은 절제했으며, 사치스럽지도 않고 빈곤하지도 않아 관에서 지급하는 비용은 손을 따라 모두 썼습니다. 그가 이와 같이 한 까닭을 고찰하면, 탐욕스런 자나 불결한 자를 거세게 질책하고 자기의 욕망을 억제하고 자기의 애욕을 버리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하여 만족하면 많음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의 견해는 항상 성공을 칭찬하고 실패를 헐뜯으며, 지위의 높음을 기대고 낮음을 떨어뜨리며, 모두 강유가 잘못된 곳에 의지하여 자신을 죽게하고 종족을 멸망시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폄하하고 다시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으니, 《춘추》에서 말하는 폄하의 의미와는 다른 것입니다. 강유처럼 학습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고, 청렴하고 소박하며 절약하는 인물은 한 시대의 모범입니다.」



강유와 이전에 촉으로 갔던 양서의 관직은 대홍려에 이르렀고, 이상은 집금오가 되었으며, 양호는 대장추가 되었는데, 모두 촉이 멸망한 때보다 일찍 죽었다.

Dr.kchris

Hello, I'm Dr.kchris, a neuroscience researcher. I love studying and trying new things and also love challenging myself. Have a great d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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