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志] 정사-위서-하후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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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돈은 자가 원양(元壤)이고 패국 초현 사람이며, 하후영(夏侯瓔)의 후예다.



열네 살 때, 어떤 사람이 그의 스승을 모독하자 하후돈은 그를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강직한 기개가 알려졌다.



조조가 처음 군사를 일으킬 때부터 하후돈은 비장(裨將)이 되어 정벌에 따라나섰다.

조조가 분무장군이 되었을 때(190), 하후돈을 사마로 임명하여 단독으로 군사를 이끌고 백마(白馬) 일대에 주둔하도록 하였고, 곧 절충교위(折衝校尉)로 승진시켰으며 동군태수에 제수하였다.

조조가 도겸을 정벌하면서 하후돈을 복양(僕陽)에 머무르게 하여 수비를 맡겼다.



장막이 모반하여 여포를 맞아들일 때, 조조의 가족들은 아직 견성에 있었다.

하후돈은 여포가 조씨 가족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간단하게 무장한 군사를 이끌고 성으로 달려가는 도중에 여포와 마주쳐 전투를 벌였다. 여포는 군사를 이끌고 물러나 북으로 들어가서 하후돈 군사들이 남겨둔 군수품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그 후 여포는 여러 장수들을 위장투항시켜 힘을 합쳐 하후돈을 사로잡아 인질로 삼고 보물과 교환할 것을 요구하니 하후돈 군중에서는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하후돈의 부장 한호(韓浩)가 병사들을 지휘하여 하후돈 군영의 문을 지키게 하고, 군감과 여러 장수들을 소집하여 각 부의 사병들이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단속하게 하고서야 모든 진영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그런 연후에 한호 등은 하후돈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인질을 잡고 있는 자들을 꾸짖어 말했다.



“너희들은 흉악한 반역자들이면서 감히 대장군을 인질로 하여 협박하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또한 우리들은 왕명을 받들어 반역한 도적을 토벌하고 있는데 어찌 장군 한 사람 때문에 함부로 너희들 말에 따를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하후돈에게 말했다.



“이것은 국법이니 저희들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병사들을 불러 인질을 잡고 있는 자들을 공격했다. 인질을 잡고 있던 자들이 당황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우리들은 다만 재물을 빌려가고자 할 뿐입니다.”



한호는 이 자들을 여러 번 책망하고 모두 베어버렸다. 하후돈이 위험에서 벗어난 후 조조는 사건의 전말을 듣고 한호에게 말했다.



“그대의 이러한 점은 만세의 모범으로 삼을 만하오.”



이에 법령을 공포하여, 지금 이후로 인질을 잡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힘을 합쳐 공격하고 인질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이로부터 인질을 잡아 협박하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다.



조조가 서주에서 돌아오자 하후돈은 대군을 좇아 여포를 정벌하는 도중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왼쪽 눈에 부상을 입었다. 그후 하후돈은 또 진류(陣留). 제음(濟陰)태수를 겸임하였고, 건무장군의 직위가 더하여지고 고안향후에 봉해졌다.



그 당시 큰 가뭄과 병충이 일어나자, 하후돈은 곧 태수의 물을 끊어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몸소 흙을 지고 장사들을 인솔하여 모내기를 권장하였으므로 그곳의 백성들은 그에 의해 이로움을 보았다. 하후돈은 후에 하남윤으로 전임되었다. 조조가 하북을 평정할 때, 대장군이 되어 후방을 방어했다. 하북 원소의 업성이 함락되자 복파장군으로 승진했으나 여전히 하남윤을 맡았고, 그의 판단에 따라서 적절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법령에 구애받지 않도록 허락을 받았다.



건안 12년(207)에 조정에서는 하후돈의 앞뒤 공적을 기록하고 식읍 1천8백 호를 추가하여 이전의 것과 합쳐 2천5백 호가 되게 했다.



건안 21년(216)에 조조를 따라 손권을 정벌하고 돌아온 조조는 하후돈을 26군의 도독으로 삼아 거소(居巢)에 머물게 했다. 그에게 각종 악기와 가기(歌妓)를 주고, 포고령을 내렸다.



ㅡㅡ 춘추시대 진나라의 대장 위강(魏絳)은 융족과 강화한 공적으로금석(金石)으로 만든 악기를 상으로 받았는데, 하물며 장군에게 있어서랴!



건안24년(219)에 조조는 군대를 마피(摩陂)에 주둔시키고, 하후돈을 불러 항상 수레에 함께 타고 행동했으며, 특별히 친근하고 존중하는 것을 보였으며 침상까지 출입하도록 하였으니, 다른 여러 장수 중에서 그와 비길 자가 없었다. 하후돈은 전장군(前將軍)에 임명되었고, 제군(諸軍)을 지휘하여 수춘(壽春)으로 귀환했고, 군영을 옮겨 소릉(召陵)에 주둔시켰다. 문제가 왕위에 오르자 하후돈을 대장군에 임명했으나, 몇 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하후돈은 비록 군중(軍中)에 있었으나, 스승을 직접 영접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성격은 청렴하고 검소했으며, 남는 재물이 있으면 곧 사람들에게 나누어 베풀었고, 부족하면 관청에서 도움을 받았으며, 재산관리를 일로 삼지는 않았다. 하후돈의 시호는 충후(忠侯)이며, 아들 하후충(夏侯忠)이 후사를 이었다. 문제는 하후돈의 공훈을 헤아려서 그의 아들 전부를 제후로 봉해주려고 하후돈의 식읍에서 1천 호를 내어 일곱 아들과 두 손자에게 나누어 주었고, 작위는 모두 관내후(關內侯)를 내렸다.



하후돈의 동생 하후렴(夏侯廉)과 둘째 아들 하후무(夏侯楙)는 스스로의 공로로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이전에 조조는 자기 딸을 하후무에게 시집보냈으니, 곧 청하공주(靑河公主)이다. 하후무는 시중상서(侍中尙書)와 안서진동장군(安西鎭東將軍)을 역임했으며, 가절(假節)이 되어군대를 이끌고 출정했었다. 하후충이 죽은 후 그의 아들 하후이(夏侯痍)가 후사를 이었고, 하후이가 죽자 하후이의 아들 하후소(夏侯邵)가 뒤를이었다.



한호(韓浩)는 하내 사람이다. 패국의 사환(史換)과 한호는 모두 충의와 무용으로 이름을 날렸다. 한호의 관직은 중호군(中護軍)까지 이르렀고, 사환은 중령군(中領軍)까지 올랐으며, 모두 황제의 근위병을 관장하고 열후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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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위의 대장군 하후돈에 대해서 연의에 대한 서술만으로 막연한 환상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실은 위와 같았으니. 정사에 비록 위와 같이 기술되어 있지만 나름대로 능력이 있고 공도 많았으니 조조가 대장군으로 내세웠을듯.



이 점은 아직도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Dr.kchris

Hello, I'm Dr.kchris, a neuroscience researcher. I love studying and trying new things and also love challenging myself. Have a great day! :)

This Post Has One Comment

  1. 나그네

    출전은 어디죠? 김원중 교수의 책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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