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원한다면 얼마든지, 노홍철 : 2부. 노홍철과 한국사회

 









세상에 두려울 것을 모르는 천진함에 대해서.


필자는 지난 1부를 본 네티즌들 중 몇몇 분들이 ‘노홍철의 계급적 안정성’ 이 그의 막나가는 행동들에 대한 안전핀이 되어준다는 지적을 해주신 걸 보게 되었다. 사실 이번 글에서 다룰 내용 중 많은 부분이 ‘제2의 노홍철’, ‘여자 노홍철’ 등으로 호명받은 이들이 공중파 진입에 난항을 겪고 있는 가운데 어떻게 노홍철은 끝까지 살아남았는가 하는 점에 대한 고찰이었다. 필자는 이를 오리지널리티에서 오는 아우라의 문제와, 광대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조건인 ‘원래 이런 인간인가’ 하는 점의 문제로 압축해서 살펴볼 예정이었다.


그러나 위의 지적을 접하고 나서 스스로가 노홍철의 ‘계급적 안정성’ 에 대해 의도적으로 피해가며 서술하는 우를 범했다는 점을 발견했다. (아마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는 일이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자칫 읽는 이들로 하여금 모종의 불편함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는 문제 아닌가.) ‘계급적 안정성’ 이란 말은 뭘까? 쉽게 말하면 ‘부잣집 아들로 어려움을 모르고 해맑게 자랐기에’ 아무에게나 들이댈 수 있다는 소리다. 이 지적은 매우 중요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다름 아니라, 노홍철의 번잡스러움이 친구 하하나, 제2의 노홍철이라 불리우는 LJ(이주연 갑 엔터테인먼트 실장)와는 다르게 공중파에서 별 반감없이 소비될 수 있는 비밀 말이다.





필자는 이에 조심스러운 태도로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부잣집 아들의 이미지’ 라는 지적에는, 그가 어려움을 모르고 풍족하게 자란 것처럼 보인다는 판단이 내포되어 있다. 실제 노홍철이 부잣집 아이이거나 아니거나 하는 문제와는 상관없이, 노홍철의 이미지를 우리가 소비할 때 우리는 그에게서 세상의 어려움을 맛보지 못 한 사람 특유의 밝고 쾌활한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다는 소리다. 그의 무례함에 남을 해하려는 악의가 없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의 행동엔 가시가 서 있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필자가 “그 이야기는 그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죽어라 투쟁하지 않아도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가져왔다는 식의 인상을 소비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비약인가? 그가 한 눈 팔지 않고 꾸준히 ‘즐거움’을 찾아 떠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즐거움 하나에만 몰두할 수 있는 계급적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은 – 필자가 보건데 – 유효한 구석이 있다. 필자는 끊임없이 ‘하바드 출신’ 이라거나, ‘순정만화 주인공’, ‘재벌 2세’ 등의 키워드가 담고 있는 부유한 이미지를 차용해서 (그것도 자기 것이 아닌 걸 빌려와서 자신의 것인양 과시하는!) 스스로를 과시하려고 하는 하하와는 달리, 노홍철이 이때까지 큰 거부감이나 큰 안티 없이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노홍철은 자신의 부나 성적을 과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가 ‘과시하지 않아도 충분할’ 위치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편으론 이것은 노홍철의 ‘광대됨’에 큰 무기가 되었다. 세상 고난과 고통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듯한 천진함을 무기로 세웠던 광대들이 그 고난을 모른 척하는 쾌활함을 가장했던 것과는 달리, 노홍철에겐 애초에 ‘모른 척’ 해야 할 어려움의 흔적이 거세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종종 하하나 MC몽이 TV에 나와서 어려웠던 무명시절과 생계를 본인이 유지해야 했던 시절의 어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눈물짓는 것과는 달리, 노홍철이 어려웠노라 회상해야 하는 세월은 시청자들에게 제대로 드러난 적이 없다. 노홍철은 어지간한 일에는 몸을 사리지 않는데, 이런 그의 과단성은 ‘어려움을 각오하고’가 아니라 ‘어려울 일이 없기 때문에’ 가능해 보인다. 즉, 그는 위기감에 있어서는 거의 무감각의 경지에 가깝다. 그 천성적인 무감각이 남들은 쉽게 할 수 없는 일들도 가능하게 했다. (이 천진할 정도로 대책없는 무감각이 가장 안 좋은 방향으로 작동한 경우를 우리는 이미 앞의 글에서 본 적이 있다. 그는 제 발로 이명박 ‘형님’을 찾아가서, 정치적 목적이 뻔히 보이는 만남 앞에서 ‘정치적으로 해석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만약 그것이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면 그런 몇 마디 말로 그 만남의 정치색이 가려질 것이라 믿는 것이 무감각하기 짝이 없는 일일테고, 정녕 정치적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감각하다는 뜻일 것이다.)





박명수의 끊임없는 ‘거성’ 타령에 시청자들이 유쾌하게 웃을 수 있는 것은, 그 단어와 그의 추락하지 않으려는 몸부림 사이에서 보여지는 간극이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풍족하다 할 수 없을 시절을 목격한 시청자들은, 그의 몸부림과 호통과 절규가 사실 간만에 손에 쥔 행복을 놓치지 않으려는 자의 발작적인 허장성세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이 화면에 얼마나 오래 등장하는가에 민감하고, 집 평수나 직업적 위계와 같은 현실적 이슈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박명수는 실리 추구와 부에 대한 집착이 너무 솔직한 나머지 시청자들에게 황당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런 그 앞에서 끊임없이 깐죽거리는 노홍철은 자신의 던지는 재치있는 말들이 박명수에게 어떤 의미로 소비되는지 미처 다 헤아리지 못 하는 것처럼 보인다. (박명수가 실제로 겪었던 고난의 세계가 노홍철에게도 같은 실체로 다가올까, 아니면 고난의 ‘이미지’로만 소비될까?) 박명수가 어쩔 수 없는 현실세계에 등을 맞대고 있다면, 노홍철은 그러한 현실의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는 그런 이유로 인해 잃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재롱을 부리는 ‘광대’ 의 자리에 올랐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광대됨”, 혹은 광대만들기


물론 위의 서술이 진실이 되려면 ‘모든 부잣집 아들들은 유쾌하고 명랑’ 해야 할 것이나, 우린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장에 필자부터가 우울하고 낯가림이 심한 부잣집 아들이다. (많은 분들이 필자를 상당히 유쾌한 사람으로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사실 필자는 그 누구보다 음울한 음지식물에 가까운 생명체이다. 필자의 ‘유쾌함’은 사실 ‘유쾌함에 대한 가장’ 내지는 ‘어떻게든 유쾌해져 보려는 안간힘의 흔적’이라고 읽을 때 진실성을 획득한다.) 노홍철은 분명 ‘부잣집 아들’ 치고도 돌연변이 같은 존재이다. 노홍철은 싸이가 특유의 계급성을 과시하면서 자신의 보수적인 시각을 양아치 어조로 담아낼 때의 미묘한 불쾌함이라거나, 박진영의 체화된 상류층의 예의 바름과 다분히 계산된 도발 같은 요소들을 지닌 캐릭터가 아니다. 그는 그저 구김살 없이 밝은 청년일 뿐이다. 번번히 강조하는 거지만, 위의 서술은 사실 실제의 노홍철이라는 개인이 어떤가에 대한 진술이라기보단 대중들이 노홍철에게서 어떤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는가에 대한 진술에 가깝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노홍철에게서 그가 뿜어내는 아우라의 이미지를 빨아먹고 있는 것이다.





논점은 이제 복잡한 ‘진실’과 ‘컨셉’의 문제가 된다. 당초 노홍철이 대중들에게 사랑 받을 수 있었던 큰 요소 중 하나는 그의 번잡함과 넘치는 활력이 ‘컨셉’이 아닌 ‘실제’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연예인들의 ‘컨셉’ 차용에 대해서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는데, 대중에게 환상을 제공하고 그것으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연예인들은 컨셉 없이 생존하기 어려운 존재다. 수많은 사람들이 ‘쟤 착해 보이는 거 컨셉이야. 뒤에 가면 엄청난 골초에다가 남자관계도 엄청 복잡하대. 가식스럽지 않니?’ 라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노홍철은 실제로도 속사포 같은 입을 지닌 쾌활한 청년이고, 실제의 삶과 방송의 삶이 둘이 아닌 노홍철에 대중들은 열광했다. (이것은 실제로도 착하기 그지 없다는 문근영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과 궤를 같이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열광의 순간, 대중들은 노홍철에게 거대한 컨셉을 하나 뒤집어 씌우게 된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롭고 풍족하다’ 는 컨셉이다. 아무리 당대의 대중들이 진솔함을 덕목으로 친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열광하기 위해선 소비할 수 있는 컨셉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아무 컨셉이 없이 있는 그대로 방송에 임하는 노홍철에게 대중들은 자신들이 소비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구김살 없는 활력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풍족한 부의 이미지를 투영시켰다. 컨셉을 싫어한다던 대중들이 컨셉을 정해서 소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사람이 스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인맥이나 스스로의 재능만 가지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 흔히들 ‘운’으로 표현하는 건데, 사실은 그 사람의 언행과 매력이 당대의 시대정신과 부합하며 대중들의 집단 무의식을 자극했을 때 비로소 스타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예능계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지식담론의 세계에서도, 영화나 음악에서도, 심지어 패션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노홍철이 광대의 자리, 스타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단순히 노홍철이 경계를 넘나들며 권위를 조롱하기 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노홍철 이전에도 아슬아슬하게 경계선을 뛰어다니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런데 왜 유독 노홍철이냐는 말이다. 그건 분명 사람들이 – 글을 쓰는 필자 역시 – 권위에 대한 도전 그 이상을 노홍철에게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대중은 노홍철에게서 어떤 것을 보았기에 그렇게 노홍철에 열광하는 걸까. 바로 위에서 말한 그의 유복하고 여유로운, 세상 더 없이 즐거워 보이는 활력의 이미지, 그에 덧붙여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 라는 무의식의 선망이다.





노홍철은 자신의 부나 학력을 과시하지 않는 대신 스스로의 매력에 대해 항변하고, 타인을 공격하는 개그를 벌이면서도 절박함이 없이 여유롭다. 그 여유로움은 박명수가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뼛 속까지 밴 루저근성에서 오는 자포자기의 여유가 아니다. 분명 자신의 위치에 만족한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여유의 이미지가 노홍철에게 있고, 그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그는 기꺼이 광대가 되어 논다. 그러나 이 광대됨이 일이 아니라 오로지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질 때, 노홍철에게는 ‘가진 자의 여유’ 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지고, 사람들은 ‘무례하지 않은 여유로움’ 을 소비하며 내심 그와 같은 기반에 서서 스스로의 삶을 한없이 즐기고 싶어하는 욕망을 그를 통해 대리 충족하는 것이다.




점점 더 위험해지는 줄타기


문제는 노홍철에게 씌워진 이런 이미지가 그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때 벌어진다. 그가 뼈를 깎는 무명의 기간을 거쳐 온 박명수를 향해 무심코 ‘형님은 느릿느릿 이렇게 걸어온 거 아냐. 저는 정말 죽을 각오로 목에서 피가 날 정도로 열심히 했어요. 형님이 7년 동안 버신 걸 전 지난 1년 간 벌었고…’ 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에게 투영된 계급적 이미지와 그 말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킨다. 이것이 <무한도전>이라는 꽁트 쇼의 일부분이라는 맥락을 지우고 바라보면, 결과는 즉각적인 불쾌함이 되어 날아온다. 최근 방영된 <무한도전> 정형돈 이사 편에서 몸이 안 좋은 어머니를 위해 이사를 하는 정형돈에게 ‘저 형은 봄 개편도 아닌데 이사를 하고 난리야’ 라고 이해하지 못 하겠다는 듯 말하는 순간, 사람들은 노홍철과 정형돈 사이에 놓여진 계층적 위계를 생각하게 된다. 노홍철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필자로서는 살필 수 없다. 하지만 한번 씌워진 이미지의 힘은 강력하고, ‘시청자들’ 은 그것을 그저 ‘별 생각 없이 한 말이겠지’ 라고 살펴서 이해해 줄 정도로 너그러운 집단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차 이야기한 거지만 그가 안국포럼 사무실에 찾아가 이명박 앞에 앉아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일 때, 이명박이 대변하는 중산층의 기득권과 노홍철이 지닌 가진 자의 여유가 악수하는 듯한 착시를 보게 되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별로 달갑지 않은 체험이다. 그의 농담과 유머가 그에게 덧씌워진 이미지와 안 좋은 방향으로 만나는 순간,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실패하는 순간 대중은 그에게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


이런 모습이 더욱 위험하게 보이는 까닭은 그러거나 말거나, 정작 노홍철 본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서다. <무한도전>은 날로 더욱 가학적인 쇼가 되어 가고 있다. 박으로 머리를 후려치지 않아도, 컨셉의 세계에 실제를 반영하며 묘한 긴장감을 즐기던 예전과는 달리 이제 서로 비난하고 헐뜯는 컨셉이 실제의 세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무한도전>은 멤버들의 실제 일상까지 비난과 헐뜯음의 컨셉에 맞춰서 읽어내는, 상상을 초월한 폭력성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획득해 버렸다. 마치 침대에 나그네를 눕혀 몸이 꼭 맞지 않으면 침대에 맞춰서 잘라냈다는 그리스 신화 속 프로크루테스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자극에 익숙해지면 더 센 자극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다. 시청자들도, 멤버들도, 자꾸 더 센 자극을 원하고 더 적나라한 모습을 원하게 된다. 모두가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무한도전>에서는 자꾸만 노홍철에게 ‘비난의 꿈나무’ 라고 북돋우며 더욱 더 날 비린내 나는 멘트를 던질 것을 부추기고 있지 않은가.





이 칼럼에서 상당히 자주 등장하는 비유지만, 지금 노홍철이 타고 있는 외줄은 유달리 심하게 출렁거리고 있는 듯 싶다. 자칫하면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이 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사회적 맥락 안에서 부정적인 뉘앙스로 읽힐 수도 있다는 걸 본인도 자각하고 있을까? 만일 이 위기를 노홍철이 잘 뛰어 넘는다면, 그것 또한 대단한 볼 거리일 것만은 사실이다. 1부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천상 광대’로서 더 많은 이들에게 더 오래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발자국만 잘못 떼어도 천길 낭떠러지인 것이 외줄 타는 광대의 길 아닌가. 필자는 1부와 2부에 걸쳐 노홍철이라는 개인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용인되는가, 그가 용인될 수 있었던 사회적 맥락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찰했다. 연재 시간 순으로 나누어 보면 빛의 장과 어둠의 장으로 양분하여 살펴 본 셈이다. 필자는 기왕 올라탄 외줄, 그가 좀 더 오랜 시간 능수능란하게 외줄을 타주길 바란다. 그처럼 자유롭게 규율과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를 잃는다면 그것은 우리 시대의 손해다. 그 외줄 위에서 오래 버티기 위해서, 노홍철은 지금 자신이 한국 사회 안에서 어떤 맥락에서 소비되고 있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광대가 거하는 자리. 축제의 자리.


무거운 이야기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데뷔 초 노홍철의 커리어를 쭉 살펴보면 일견 당연해 보이지만 한편으론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활약했던 무대들을 쭉 나열해본 뒤 겹치는 단어들을 모아보면 큼직한 키워드 몇 개를 얻을 수 있는데, ‘축제’, ‘페스티벌’, ‘파티’ 가 바로 그것이다. 박명수가 늘 지적하듯 ‘길바닥에서’ 시작한 그의 커리어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축제로 시작된 것이다. ‘길바닥에서’ 시작했다는 말은 뒤집어보면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는 수많은 축제의 마당에서 거리낌 없이 스스로를 던져서 분위기를 띄우는 광대였고, 축제의 중심이었다. 어느 장소에서든 낯가림도 두려움도 없이 즐거움을 찾아서 올인하는 그의 성격이 축제의 유희성과 맞아 떨어진다는 점은 그의 ‘광대됨’을 더욱 강하게 증거하고 있다. 실제로 노홍철의 싸이월드 미니홈피(http://cyworld.com/hongchul)를 방문하면 제일 먼저 ‘아하하하하하! 내 인생은 늘 축제축제!’ 라고 쓰여진 홈페이지 제목이 방문자를 반긴다. 가발을 쓰고 한껏 웃으며 폴짝폴짝 뛰어 다니고 있는 프로필 이미지는 축제의 분위기를 달구는 어릿광대의 모습과 다름없다.


이 글의 제목인 ‘원한다면 얼마든지’ 는 사실 노홍철의 미니홈피에 실린 이 한 장의 사진에서 비롯되었다.





2005년 10월, 진주에 위치한 경상대학교 특강에서의 노홍철의 모습이다. 언뜻 보기에도 수천에 가까워 보이는 이 인파들을 앉혀놓고 그는 27년간의 자신의 생애에 대해서 2시간에 걸친 강의를 했다고 한다. 대단한 사업적 성공이나 학술적 성취를 거둔 것도 아닌, 그저 방송인에 불과한 스물 일곱의 그가, 수천의 20대 대학생들 앞에서 두 시간 동안이나 떠들어댔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생에 대해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다. ‘나는 내가 너무나 사랑스럽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이 사내가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의 끝은 어디일까. 이 사진 아래 달린 쪽글은 다음과 같았다.


‘수천명이든 수억명이든, 원하면 끝까지.’


그야말로 대단한 자신감 아닌가. 누구든 자신을 원하면, 끝까지.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스믈스믈 밀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대중들은 그에게서 ‘무엇’을 원하는가? 그래서 그 ‘끝까지’ 보여주었을 때, 대중들은 여전히 노홍철을 사랑할까? 노홍철은 발을 헛딛진 않을까? 1부에서 필자는 그가 도전할 권위는 앞으로도 많다고 말하며 글을 마친 바 있다. 필자는 그가 이렇게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신명을 다 해서 광대놀음을 하는 모습을 아주 오랫동안 지켜보고 싶다. 그가 좀 더 많은 축제의 자리에서 놀아주는 것을 보고 싶다. 그가 공격하고 도전하는 것이 그의 동료들과 스스로가 되지 않기를, 그 조롱의 대상이 더 많은 권위들이길. 부디 그가 외줄 위에서 다음 발자국을 신중하게 뗄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 : 이 글은 듀나게시판(
http://djuna.cine21.com/bbs/zboard.php?id=main)의 Cato님과 9님이 지적하신 논점에 적지 않은 부분을 빚지고 있음을 밝혀둡니다. 아이디어를 차용할 수 있도록 너그러이 허락해주신 두 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정리
| tintin

출처 : 사용자 삽입 이미지

Dr.kchris

Hello, I'm Dr.kchris, a neuroscience researcher. I love studying and trying new things and also love challenging myself. Have a great day! :)

Leave a Reply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