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원한다면 얼마든지, 노홍철 : 1부. 규율을 넘나드는 광대

 










* 전체 분량이 예상보다 지나치게 길어져서 A4 10장을 가뿐하게 넘어갈 것으로 예상되는 관계로, 총 2회에 나눠서 업데이트가 되겠습니다. 한번에 다 올릴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많은 독자분들이 A4 3장만 넘어가도 ‘스크롤의 압박 때문에 다 못 읽겠다’ 는 반응을 보이시는 것을 감안해보면 시차를 두고 업데이트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2부는 4월 7일 토요일에 업데이트 됩니다.


필자가 일 년 간의 외도를 끝내고 학교로 돌아가서 겪은 일 중 흥미로운 사건 하나를 들어 글을 시작해보도록 하자. 공강 시간을 때우기 위해 예술관 갤러리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복도 저 편에서 걸어오는 한 청년과 마주칠 일이 있었는데, 갑자기 이 청년이 필자에게 쪼르르 달려와 ‘안녕하십니까’ 하고 90도로 인사를 하고 가는 것 아닌가. 왜 이 청년은 생면부지의 필자를 보고 인사를 했을까. 예술대 학생들이 유달리 더 예의가 바르고 인사성이 좋아서? 그건 아닐 것이다. 연극영화나 무용학과의 경우, 다른 학과에 비해서 공동작업이 많다보니 선후배간의 단합이 강조되는 면이 있다. 이름과 얼굴을 빨리 익혀야 서로가 편해지는지라, 학년 초엔 가슴에 명찰을 달고 다니는 새내기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런 실질적인 필요성이 한국의 서열 문화와 만나면 ‘선배로 추측되는 모든 이들에게 90도로 인사하며 스스로를 어필하는’ 학생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의견을 통일하고 공동작업의 방향성을 신속하게 정하기 위해 선후배 간의 규율을 강하게 단속하고, 후배들은 깍듯하게 ‘선배님’이란 존칭을 사용하며 ‘하십니까’, ‘아닙니다’ 등의 ‘다나까’ 어미를 사용하는 풍경은 한편으론 이해가 가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하다. 참 한국적인 풍경이라고 쓰면 애국심이 남다른 분들은 발끈하시겠지만, 필자가 보기엔 그렇다.

위의 경험에서 필자가 ‘한국 사회의 위계질서, 서열 문화의 보수성은 정말 견고하다’는 결론으로 곧바로 달려 간다면 동의하지 못 하실 분들이 계실 듯 하니 또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얹어 보도록 하겠다. 한국 사회의 연령, 신분의 위계질서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 중엔 ‘지독하게 복잡한 한국어의 경어 체계’를 빼놓을 수 없다. 이에 대해 아주 소상하게 서술한 칼럼니스트 고종석씨의 근간 <바리에떼>의 일부분을 옮겨본다.

한국어 화자는 상대방과 자신의 위계를 미리 정하기 전에는 말을 걸 수가 없다. 한국어 경어 체계의 복잡함이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것은 용언의 종결형에서지만, 손아랫사람이나 허물없는 친구에게 말을 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2인칭 대명사가 사실상 사용되지 않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학교문법에서의 설명과는 상관없이, 한국어의 2인칭 대명사는 구어의 수준에서는 실질적으로 ‘너(너희/너희들)’ 하나뿐이다. 약간의 높임을 지닌 대명사로 ‘당신’이 있기는 하지만, 이 말은 중년 이상의 부부 사이나 다소 긴장된 화용 공간에서만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된다. 학교문법의 설명을 믿고 아무에게나 ‘당신’ 이라고 했다가는 싸움 나기 십상이다. 한국어에서 존칭을 사용해야 할 대상에게는 2인칭 대명사의 자리를 제로zero 형태로 비워두거나, 연령적 가족적 직업적 신분적 위계를 표시하는 명사(선배님, 아버님, 국장님, 선생님) 또는 상대방의 이름(숙자씨)을 사용한다. 즉 3인칭을 2인칭으로 사용함으로써 직접성을 완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에 그 이름 뒤에 붙이는 접미사 ‘씨’가 점차 예사말의 뉘앙스를 띠게 돼, 높여야 할 자리에서는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손윗사람을 면전에서 아무씨라고 지칭하면 상대방의 얼굴빛이 이내 어색해질 것이다.

(고종석. <바리에떼>. p155~156)
상대와 스스로의 위계를 정하지 않으면 말을 꺼낼 수 없다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영어의 ‘you’의 경우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이고, 불어의 ‘vous/tu’의 구분은 그저 격식을 차려야 하는 생면부지의 남인가 혹은 격식을 크게 차릴 필요가 없는 면식이 있는 사람인가를 구분해 줄 뿐이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어미의 뉘앙스에 따라 세세하게 구분을 하는 정도를 넘어서, 상대방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을 둘러 싼 겹겹의 위계질서가 화자의 목을 죈다. 단순 연령의 서열을 넘어서서, 상대방의 신분적 위계를 살펴서 호칭을 구분해 줌으로써 상대의 체면을 세워주고 권위를 존중해 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간신히 용언의 종결형의 미묘한 구분을 가릴 수 있게 된 후에도 종종 말실수를 하게 되는 것은 상대를 부르는 호칭의 그 복잡미묘함을 다루는 일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한국어가 달리 배우기 어려운 언어가 아니다. 언어가 그 사회의 풍경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현대 한국어는 분명 현대 한국 사회의 보수성을 반증하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쯤 되면 독자 여러분들은 아마 궁금하실 것이다. 어째서 노홍철에 대한 글을 쓰겠다면서 이렇게 사설이 길고 장황한 것인지 말이다. 이에 필자는 노홍철의 2004년 MBC 방송연예대상 쇼 버라이어티 부문 남자 신인상 수상 소감으로 설명을 대신하려고 한다.

‘어우, 정말로 상상도 못 했고요. 제가 알아요. (제가) 한국 정서에 잘 맞지 않는 캐릭터라는 걸 제가 잘 아는데, 저를 받아 들여준 MBC에 감사하고요.’

‘한국 정서에 맞지 않는 캐릭터’ 라. 노홍철의 캐릭터는 상대방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한다. 요란한 헤어스타일과 수염. 현란한 옷차림과 쉴 틈없이 떠들어대는 ‘퀵마우스’. 그리고 누구든지 초면에 ‘형님’, ‘누나’, ‘우리는 친구’라고 외치며 달려드는 무시무시한 친화력 앞에서 뻣뻣하게 굳어버린다면 그대로 ‘권위적인 사람’이 되기 십상, 같이 입을 벌리고 손바닥을 펼쳐보이거나 최소한 유쾌하게 웃어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위 아래를 크게 가리지 않고, 초면인 사람에게 낯가림을 부릴 여유를 주지 않는 노홍철의 캐릭터는 위계서열과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선 (어떤 의미에선) 위협적인 존재일 수 있다. 학교나 사회에서 우리는 처음 보는 사람이 ‘형님’, ‘누나’ 하면서 달려들어 말꼬리를 툭툭 놓고 어리광을 피우는 것을 용인하지 않지만, 브라운관 속에서 노홍철이 온갖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유쾌하게 바라본다. 후배들에게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안녕하십니까’ 하고 깍듯하게 인사하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노홍철이 초면의 – 게다가 친구 아버지이고, 다 떠나서 한국 축구 역사의 살아있는 신화인 – 차범근에게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가 덥석 끌어 안으며 ‘야아아아~ 형님~ 반가워 반가워’ 라고 말했다는 일화를 들으며 폭소를 터뜨리는 광경.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노홍철에게 ‘형님’ 소리를 들은 것이 어디 차범근 뿐이겠는가. 그는 MBC 예능국장에게도 ‘형님’ 이라고 부르고, 디자이너 앙드레 김과 함께 찍은 사진을 미니홈피에 올려놓고 ‘봉남이 형님과 함께’ 라고 제목을 적어 넣는다. 그에게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일단 ‘형님’이다. 급기야는 (당시) 서울 시장이자 차기 대권후보인 이명박 앞에 가서도 ‘형님’ 이라는 말이 튀어 나오는 걸 주체하지 못했다. (물론 영리한 정치가인 이명박은 그에게 ‘자네는 이미 내 동생이니 언제 차나 한잔 하세’ 라고 화답하며 쿨한 이미지를 어필했고, 최근 노홍철은 ‘형님’ 이명박의 사무실로 찾아가서 이명박의 저서들을 선물 받았다.) 친구 하하의 집을 제 집처럼 드나 드는가 하면, 처음 보는 친구 어머니에게 대뜸 ‘엄마! 엄마!’ 라고 부르며 어린 아이처럼 애교를 부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가 막힐 지경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당혹스러워 하는 청자들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친해지고 싶어서’ 라고 간단하게 대답한다. 그에게 한국어의 복잡한 호칭 체계와 한국 정서가 요구하는 예법은 한없이 무의미에 가깝다.






한국 정서에 잘 안 맞는 캐릭터라고 자인하던 그는 자신이 오늘날의 위치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을까. 과연 누가 <놀러와>에서 ‘근본이 없다’는 소리를 듣던 바람잡이 파이팅맨이 소녀 떼를 운운할 수 있을 정도로 거물이 되리라고 ‘상상’ 이나 했을까. 대한민국 예능계 족보에 전에 없던 이 정신 산란한 노란 머리 사내는 그간 수많은 경로로 우리를 찾아왔다. 대한민국 버라이어티 쇼의 터줏대감 <일밤>에서 신동엽과 애보기를 하는가 하면, 종종 놀림감이 되긴 하지만 짧게나마 라디오 DJ 생활을 하면서 목에서 피를 토하기도 했다. 공중파 나들이의 시작점 <놀러와>, 대한민국 예능계의 전무후무한 괴물 <무한도전>, KBS <해피 선데이 – 쾌남시대>까지 금-토-일 저녁 버라이어티를 넘나드는 노홍철은 아직까진 소진되지도, 식상해지지도 않은 듯 하다. 선배들을 조롱하고 아무에게나 말을 트고 달려드는 그의 광대놀음은 오히려 날이 갈 수록 더 독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 제기를 고종석씨의 책에서 빌어왔던 것처럼, 답을 찾을 수 있는 근거 역시 남의 책에서 빌어와 보자. 칼럼니스트 진중권씨의 책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서 광우(狂愚)에 대한 대목을 잠시 옮겨보자면,
중세에 광우는 외려 지혜로움의 징표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발달한 헬레니즘의 세속적 똑똑함에 사도 바울로는 복음서의 어리석음을 대립시키며 이르기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린도전서> 3장 18절)
(중략) 고대에 광우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다. 에라스무스의 책에 인용된 호라티우스가 이르기를, “그대의 생각에 약간만 광기를 섞으라. 알맞게 헛소리를 함은 즐겁도다.”라고 하였다. 중세만 해도 광우는 경외의 대상으로 일상의 일부였다.

(중략)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의 왕궁에는 광우가 있었다. 궁정의 바보는 왕의 권위를 조롱하고 그의 권세의 무상함을 노래하는 광대였다. 왕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는 그들의 무례함은 선천적 정신박약의 탓으로 여겨져 너그럽게 용서되었다. 후천적 광우들, 즉 일부러 미친 척을 하는 훗날의 광대들은 광우에게서 이 발언의 자유를 물려받는다.

(진중권.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p57~58)
세상 최고의 자리에 앉은 왕까지 마음껏 희롱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광대의 존재를 우리는 영화 <왕의 남자>를 통해 만난 바 있다. (물론 우리 나라 역사를 뒤져서 궁중 광대가 있었다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딱 한 줄, 공길에 대한 언급 뿐이지만 말이다.) 중세 시대 궁중에서 왕에게 함부로 막말을 하고 조롱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광대였고, 제 아무리 폭군이라 하더라도 멋대로 광대를 죽이는 것은 옹호받지 못 할 금기에 가까웠다. 바보를 자처함으로써 이성의 규율에서 벗어나 세상의 예법을 무시하고 권위를 조롱하는 광대, 어찌 보면 그들은 지금의 예능인들의 선조 아닌가. 그렇다. 필자는 이 글에서 노홍철의 자유분방함이 공중파에서 허용되는 까닭으로 그의 ‘광대근성’을 지목하려 한다. ‘광대’ 라는 말이 주는 어감에 반감을 가지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많은 예능인들이 스스로 광대를 자처하며 그 단어에 자부심까지 느끼는 걸 감안하면 노홍철을 ‘광대’라 칭하는 것이 그리 심한 결례는 아닐 듯 싶다. 물론 나 역시 이 단어에 존경과 경외의 의미를 담뿍 담아서 사용할 생각이다. 우리 인생에서 광대가 없다면 누가 우리 대신 울고 웃어주겠는가.






거푸 얘기하고 있는 거지만, 노홍철의 첫 인상은 ‘정신없음’ 이다. 온 몸을 휘감고 있는 요란한 의상. 말장화와 딱 붙는 바지에 요란한 프린트의 티셔츠를 걸치고 치렁치렁한 스카프를 두르고, 염색한 머리는 곱게 땋아서 고개를 돌릴 때마다 따라서 흔들거리게 늘어뜨린 노홍철을 처음 보고 ‘참 차분한 젊은일세’ 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마 극히 드물 것이다. 실제로 그가 처음 데뷔했을 때 가장 많이 등장했던 자막은 ‘말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는 담당 PD들의 토로였고, 툭하면 ‘공중파가 아직 낯설어서’ 라는 핑계를 대며 그의 번잡스러움에 대한 면죄부를 구하곤 했다. 대다수의 시청자들도 처음엔 ‘왠 이상한 놈이 뜨려고 온갖가지 컨셉으로 들이민다’ 고 투덜대며 그에게 비호감 딱지를 붙이려 했었다. 그러나 그와의 친분을 자랑하는 수많은 연예인들이 연이어 증언하기 시작하며 이야기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놈은 컨셉이 아니라 원래 삶이 이래요’ 라는 증언 앞에서 ‘뜨려고 환장한 놈’ 은 ‘인생 자체가 정신나간 유쾌한 놈’ 으로 소비되기 시작한 것이다. 담당 PD들은 그의 말을 일일이 다 옮기는 대신 X(곱하기)2, X3 같은 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의 번잡스러움에 대한 변명도 조금씩 자취를 감췄다. 노홍철이 공중파에 길들여진 것이 아니라, 공중파가 그에게 문호를 열게 되었다.






“군대에 가면 내가 바뀔 줄 알았는데, 되려 내가 군대를 바꿨다.”


물론 노홍철은 바보가 아니다. 조증 환자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세간의 기준으로 봤을 때 ‘미친’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소위 말하는 ‘진취적인 젊은이’ 에 가깝다. 두 번이나 토익 시험 만점을 획득할 정도로 머리가 비상한 그는, 서른도 채 안 된 나이에 혼자 뚝딱거리며 쇼핑몰을 만들어 운영했고 배편으로 중국을 오가는 관광회사를 차려 사장 노릇까지 했을 정도로 자신감과 도전 정신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이다. 노홍철은 그저 자신의 기준에 맞춰 즐겁게, 멋지게 살려는 사람일 뿐이다. 그것은 “If it’s Not Fun, Why do it?” 이라는 좌우명이 말하는 것처럼 즐거움이라는 잣대로 삶을 꾸리는 노홍철의 존재미학이다. 그는 자신이 세워놓은 미적 기준에 맞춰서 집안의 인테리어와 물건의 배치를 통제하고 자신과 자기 소유의 물건들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즐기며 그 과정에서 남의 눈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고, 패션조차 남들과 발맞춰 유행을 따라가지 않으면 낙오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에서 그런 노홍철의 존재미학은 자칫 ‘미친 놈’ 내지는 ‘돌아이’ 처럼 보일 공산이 크다. 집단의 규율에 맞추지 못 하는 사람을 우리가 흔히 ‘사회 부적응자’ 로 분류하고 낙오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런 시선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노홍철의 천성은 마치 중세의 광우가 그랬던 것처럼 너그러운 용서의 대상이 된다. ‘원래 그런 놈’ 에게 사회화를 요구하는 법은 없지 않은가. 아이러니하게도 노홍철의 존재미학과 한국 사회가 빚어내는 갈등의 양상이, 노홍철에게 한국 사회의 규율과 금기를 마음껏 뛰어넘을 수 있는 황금티켓을 선사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그에게 얌전해질 것을, 사회의 예법을 따를 것을, ‘사회화’ 될 것을 바라지 않는다. 노홍철 앞에서 만인은 ‘형님, 누나, 친구, 소녀’ 로 분류되고, 사람들은 그 과격한 분류법 앞에 기막혀 하면서도 은근히 그가 또 다른 권위 앞에서 기죽지 않고 ‘형님’ 이라고 외치길 기대한다. 그의 ‘형님’ 이란 말 속엔 한국의 위계 서열 문화의 변종인 조폭 문화의 기운이 거세되어 있다. 최민수와 이훈이 형님 동생 하며 호칭을 나눌 때의 그 미묘하지만 분명한 계층 구도가 노홍철의 ‘형님’ 엔 없다. 유재석과 박명수에게 ‘형님’ 이라고 부르면서도 언제든지 그들을 향해 비아냥과 조롱을 날릴 준비가 되어 있는 노홍철의 화법 속엔 위계 서열의 기운이 깨끗하게 사라져 있다. 시청자들은 그의 천성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가 자신의 천성대로 놀아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의 무례함과 버릇없음은 분열을 조장하기 위함이 아니라 철저하게 ‘재미 있자고’ 벌이는 유희의 도구일 뿐이지만, 보는 이들은 이미 그를 통해 한국 사회의 숨막히듯 철저한 위계 서열의 규율을 넘나드는 쾌감을 맛보기 시작했다. 노홍철이 아무에게나 ‘형님’ 이라고 부르며 안길 수 있는 것은 – 그런 시선을 받게 된 것이 노홍철 본인의 의사건 아니건 간에 – 이미 사회에서 그가 광대로 공인받았다는 증거다. 공중파 데뷔 3년차, 아직 도전할 권위들은 많다. 광대로서의 노홍철의 커리어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정리
| tin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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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chris

Hello, I'm Dr.kchris, a neuroscience researcher. I love studying and trying new things and also love challenging myself. Have a great d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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